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1479년,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지다 === [[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mnigtvWdmn1r2r773o2_r1_500.jpg]]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뒤, 그리스 남부 지역에서 제국의 유일한 속령으로 남아있던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1460년 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당시 모레아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들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토마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적이었고, 디미트리오스는 서유럽 세력에 반감을 가진 한편 오스만에 호의적이었다.],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려 토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 그리고 메흐메트는 이것을 명분으로 모레아 정복에 나섰고, 결국 토마스는 [[교황령]]으로 망명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에디르네의 왕궁에 갇혀 그곳에서 죽었다.[* 디미트리오스는 메흐메트의 봉신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망명하지 않았는데, 메흐메트는 정복이 끝난 모레아를 그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으로 선포했다. 당시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에 앉히지 않느냐고 묻자,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떤 나라를 주더라도 과분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스 전역을 세력권에 넣은 후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메가스 콤니노스(위대한 콤니노스)로 지칭한 [[트라페준타 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라페준타 황실은 [[조지아]] 왕과 다른 튀르크 부족들에게 구원을 청하고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수백 년을 이어온 위대한 콤니노스 왕조는 1461년에 오스만에 항복한 후 그동안 저항한 대가로 일부는 처형당하고 일부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일개 백성이 되었으며, 그 외 나머지는 조지아 등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흔적을 남긴 사람은 없어, 왕조로서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트라페준타가 망한뒤로도 제국의 잔재는 아직 남아있었다. 이 잔재의 정체는 크림 반도에 남아 있던 테오도로 공국이었고 이들은 제국이 망한 1453년부터 지속해서 오스만에 저항하고 있었다. 특히 트라페준타가 멸망하자 오랜 라이벌이던 카파의 제노바 식민지와 평화협정을 맺고 공동연대를 하기까지 하는 등 골칫거리로 남아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이들을 정복하기까지 트라페준타가 멸망한 뒤로부터 꼬박 14년을 매달려야 했고 마침내 1475년 [[테오도로 공국]]의 수도 도로스를 함락시키고 1479년에는 이탈리아계 귀족이 지배하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마저 멸망시킨다. 이로써 2,2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그 잔재마저 완벽히 사라지고 만다. 한편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교황에게 형식적으로나마 황제로 대접받다가, 망명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465년]]에 [[로마]]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가 뒤를 잇자 기다렸다는 듯 교황이 지원금을 줄여버렸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했는지 죽기 직전에는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왕에게 다시 한 번 팔아넘기기까지 했고[* 이때 샤를 8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1502년]]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이때 안드레아스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고[* 다만 안드레아스 사후, 그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인물들이 몇몇 나왔었다.], 황제의 칭호를 사들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은 허울 뿐인 로마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아우구스투스]] 이래 '''1,500여년'''을 이어온 로마 황제위는 그렇게 명목상 계승권마저 흐지부지되며,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다만, 토마스와 안드레아스가 교황령으로 망명한 이후 실제로 사용한 칭호는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 Constantinoplitanus)'였는데, 이는 멸망한 [[동로마]]와는 달리 아직도 건재했던 [[신성 로마 황제|서방 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당당하게 로마 황제를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드레아스로부터 칭호를 사들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들도 실질적인 이득은 없는데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리스크]]만 있는 로마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때 지중해 전역을 호령했던 로물루스의 후예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토마스의 딸이자 안드레아스의 누이인 조이 팔레올로기나는 안드레아스와는 달리,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녀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로 개명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반 3세는 이 결혼을 계기로 [[차르]]를 자칭하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했으며, [[루스 차르국|러시아가 차르국임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이 혼인을 주선하면서, 아직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정교회]] 국가들 중 가장 강력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회유하여 [[가톨릭]] 중심으로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이반 3세가 차르를 칭하고 정교회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명칭만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제3의 로마' 를 칭한 나라는 이전에도 많았다. 먼저 [[세르비아 왕국(1217년~1346년)|세르비아]] 왕 슈테판 우로시 4세(슈테판 두샨, 1331~1355)는 1346년에 황제를 칭하면서 '세르비아와 로마니아의 황제'를 자칭하고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 했고,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1331~1371)도 불가리아의 수도 투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도, '카이세리 룸'. 즉 '로마 황제' 를 칭했다.] 이후 류리크 왕조는 1598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까지 등장한 차르들이 모두 소피아의 직계 후손들이라 러시아에서는 로물루스의 후예들이 그나마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바실리 3세|아들]]-[[이반 4세|손자]]-[[표도르 1세|증손자]]까지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변경백국]]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분가]][* 이 쪽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인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시작된다.]는 살아남아 약 백년을 더 이어갔다. [[1530년]]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 4세가 만 13세로 요절하고 마지막 남성 구성원이자 보니파시오 4세의 숙부였던 조반니 조르조 팔레올로고가 1533년에 죽은 이후 부계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지만,[* 다만 조반니가 사생아 아들을 하나 남겨뒀고 그 사생아의 후계가 계속 이어져 2007년 조사 결과 팔레올로고오리운디라는 이름으로 1981년생, 1983년생 남자 후계자가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다는게 확인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잡아도 이들 모두 40대 초반이라 한창 나이인 만큼 사고만 없었다면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마지막 후계자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1510~1566)가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2세와의 결혼에서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이쪽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단절된 본가와는 달리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 족보를 정확히 추적할 수가 있는데, 그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동명이인)가 [[로렌]]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조상[*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단절되는 합스부르크 본가와는 구분된다.]이 되었다. 그러므로 좀 뜬금 없지만 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약 800년 전 조상은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2세]]가 되고, 또 2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시오스 1세]]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